minjung
2025-,
안개와 뼈
between fog and bone
본 전시는 2025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작으로 서울특별시와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This exhibition is supported by the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and is presented as part of the 2025 Seoul Arts Creation Support Program, funded by the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and the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물질적 회화 또는 포스트-수묵화적 수묵화를 위한
페미니스트적인 개입
양효실
기민정 작가(이후 작가로 통칭)는 2025년에 자신의 30대, 10여 년간의 작업을 비교 작가들 및 예술론을 배경으로 분석한 박사논문을 썼고, 하반기에는 신작으로만 구성된 개인전 《안개와 뼈》를 열었다. 학위논문 『한지와 유리의 물성에 기반한 ‘사이(in-between)’의 감응 표현 연구:나의 작업을 중심으로』는 추상적 이미지나 재현적 ‘도상’의 지지대-바탕으로서의 한지와 나아가 유리(!)를, 수단-소재가 아닌 작가와 함께 감응하며 “사이”를 개방하는 타자로 대우해 온 자신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었다. 작가의 한지는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그러므로 동양화의 비가시적 조건이란 위치로부터 주제이자 물질로 자리이동한다. 종이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이미지-주제가 아니라 종이의 물성을 전시에서 더 중요하게 우대하는 것, 주와 종, 전과 후의 위계적 관계를 뒤집어서 두 번째를 첫 번째보다 더 중요하게 대우하려는 것, 여기에 작가의 관심이 놓여 있다. 당연한 보기(ways of seeing)의 구조를 뒤집어서 감상-관조보다는 비판-뒤엎기에 관람 시간을 사용하게 하는 것, 개념적-실험적 작업의 태도이다. 명시적으로 페미니스트적 실천-수행으로는 읽히지 않는 작가의 작업을 내가 페미니스트적이라고 읽으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성적(female) 도상이나 여성적인(feminine) 기표가 없는 이 작가의 일견 추상적인 화면은 주지하다시피 동양화, 특히 수묵화의 전제를 가시화하고 그럼으로써 더 이상 동양화-수묵화로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그 규범을 해체하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여성적 소재나 경험이 거의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작가의 작업은 그러나 무엇보다 수묵화의 ‘남성적’ 구조를 문제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혹은 “여성적인” 물성을 보유한 물질들―화선지, 유리, 스테인리스와 같은―에 의탁해서 전시장 환경을 더 포용적이게(inclusive) 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페미니스트적이다. 관객으로서의 여성 공동체의 동일시나 차이에 대한 정치적 각성에 기여하려는 의도 없이, 환경적-시각적 배치의 맥락에서 페미니스트적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이러한 관점-읽기를 천천히 제시하려고 한다.
화선지라는 미디움-몸의 물성/타자성
통상 채색화의 바탕인 한지(korean paper), 혹은 장지는 “질기고 보존성이 뛰어나다.” 이는 화선지와의 비교 속에서 획득된 한지의 “장점”이다. 혹은 중국에서 들어온 종이인 화선지, 수묵화의 바탕인 화선지에 대한 자민족중심주의적 리액션이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만들어진 동양화란 이름이나 우리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특히 강하게 일었던 1980년대 적극 사용되기 시작한 한국화란 이름은 같은 듯 다른 듯 혼용되어 사용된다.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중시하는 진영과 한국적 고유함을 확보하려는 진영의 대립은 여기서 다룰 주제는 아니지만, 수묵화와 채색화의 범주적 차이를 보유한 물질이 각각 화선지와 한지임은 분명하다. 물성을 정체성을 구획 짓는 외연으로, 혹은 비가시적 전제로 이해할 때 그 둘의 차이를 거론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작가는 자신이 사용해 온 한지와 한지의 확장으로서의 유리가 주제인 논문을 제출하고, 2025년 하반기 MO BY CAN에서 “화선지에 먹”이 공통의 기반인 전시 《안개와 뼈》를 열었다. 먹의 농담만으로 그리는 수묵화, “동아시아 그림 그리기의 기법”, “한국화의 핵심 구성요소”로 불리는 수묵화는 대체로 화선지를 지지체로 해서 나타난다. 수묵화의 기원적 바탕이었던 비단이나 이후 한국의 독특한 종이인 한지와 달리 저렴한 산업적 공산품인 화선지는 “농담(濃淡)을 중시하는 수묵의 삼투압 원리를 구현하는데 적합하다는 특질”(작가의 설명)을 사후적으로 보유하게 된다. (먹)물에 속절없이 젖고, 뒷면에도 흔적-형상이 각인되는 이 산업적인 낱장의 종이의 유연함-수동성-취약성은 남성 지식인 문화로서의 수묵화 “내부를” 구성하며 타자로서 공존하는 어떤 여성적인 것, 나아가 중성적인(바르트적인 의미에서의) 미디움에 대한 동시대적 사유를 건드린다.
21세기 전후 동양화 진영에서는 서양화-동양화라는 해묵은 대립을 지양하며 수묵-추상이라는 혼종을 모색하거나, 남성 지식인 문화로서의 수묵화에 대한 자의식적 대립항으로 재구성된 채색화를 여성적 이미지나 서사와 절합 함으로써 수정주의적 개입을 시도하는 식의 다양한 방향의 실천이 존재했다. 2005년에 대학에 입학한 작가 역시 과연 주어진 형식으로서의 동양화 -수묵화를 따를 것인가, 수정할 것인가, 이탈할 것인가 등등의 선택지를 놓고 고심했을 것이고 동시대적 감각과 수 세기를 이어온 규범 사이에서 차이를 견지하려는 다양한 샛길을 모색하며 다양한 실험을 했던 것 같다. 한동안 작가는 동양적-한국적 주제-서사를 추상표현주의적 회화(“캔버스에 유화” 형식의)와 절합했고(가령 2014년의 개인전 <몽유도>의 “바리데기 공주” “젊어지는 샘물의 비밀”과 같은 제목을 단 회화들), 그 이후 한동안은 한지에 먹과 채색을 올리는 수묵 추상에 의지한 채 ‘선 드로잉’ 기법으로 자신의 여성적이고 일상적인 경험들―연애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에서 작동하는 권력 불평등을 의식하고 있는―을 화면에 담았다(2015년의 개인전의 제목인 “사랑의 정치”의 제목들인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라든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시사하듯이).
그리고 이번 신작의 “기원”이라 할, 규정적인 프레임을 벗어나 마치 천처럼 허공에 걸린 화선지 무더기나 마치 조각처럼 전시장에 서 있는 화선지 무더기가 나타나는 2019년의 경험-상황-전시가 있다. “화선지에 먹”은 이미 항상 수묵화라는 이념, 혹은 “유물”을 가리키는 장치이지만,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것을 출발로 입체-설치-조각으로 외유하는 이 작가의 전시에 대한 경험은 수묵화로 환원되지 않는다. 2019년 “노들역 근처 창문이 많은 작업실”에서 작가는 “화선지를 화판에 붙이거나 배접해서 쓰지 않고 낱장의 화선지나 순지를 석회벽에 간단히 종이테이프로 고정한 뒤 그림을 그렸다”(박사논문, p.114 참조). 질기고 오래가는 한지의 물성보다 “섬유질이 약해서 잘 찢어지고 질긴 생명력이 없고 연약해서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있는 저렴한” 화선지를 선택한 뒤 화선지의 물성을 더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즉 지지대 없이 벽에 붙이고 그리는 방향으로, 작업실-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선회했다(능동과 수동이 겹쳐지는 지점이 늘 전환기가 된다). 당시 자신이 사용한 종이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동명사적 상황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 밀도로 경험되었는지를 작가는 이렇게 논문에 기록했다. “벽에 흔적 남기기/창문 앞에서 빛 머금기/벽에서 떨어져 내리기/망했다 싶으면 구석에서 구겨져 있기/바람 불면 흔들리기”(박사 논문, p.115).
2019년 OCI 개인전 《종이를 세우고 돌을 감으면 가루가 흐르고 천이,》는 작업실에서의 경험을 현상학적 사건으로 해석-배치한 전시였다. 우선 전시 제목이 그런 “발견”을 표식한다. 동명사들(hoisting, rolling, floating)이 대우받고, 정리-결론을 함축한 마침표를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쉼표의 행위가 대신한다. 전시 제목은 우리가 전시장에서 눈으로 보는 물질들의 상태에 대한 묘사에서 멈춘다. 그 너머, 정신적인 가치나 심리적인 연상이 제목이 되는,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알리바이가 되어야 하는 과정이 제거된다. “기법과 과정에 대한 축어적 설명”, 즉 “종이를 쌓아 올린 더미와 석고 반죽을 감아 만든 색색의 괴석들, 그 아래 검은 가루가 흐르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 대형 천”(OCI 설명문)이 이 수행적-현상학적인 경험에 바쳐진 전시의 전부였다. 화선지를 벽에 붙이고 그림을 그렸고 이후 벽에서 뜯어낸 화선지는 조각처럼 서 있고 “벽화”가 화선지에 그린 “그림”을 대신하고, 괴석은 석고 반죽으로 만들었고... 보이는 게 전부이다. 너머의 관념-정신 혹은 “깊이-본질을 담을 수 없는 물질”인 화선지의 물성을 발견하고 거기서 멈추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보았던 경험이 전시장을 채웠다. <투명하고 깨질 것 같은 화선지에 대한 실험>, <불과 바람>, <휘발하는 선과 종이>(작품들의 제목)와 같은,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물질의 직접성을, 수단을 목적보다 우대하는 감각적 유연성을 전경화한 이 전시에서 우리는 이분법적 대립의 해체를, 중성적인 사이에서의 작용-감응을 감각하게 된다.
수묵화의 도상-이미지로서의 괴석에 대한 주관적 해석/변용
주지하듯이 도교적 도상들인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가 돌이고, 더 정확히는 기암괴석으로서의 돌이다. “장수와 불변”을 반영한 괴석(odd stones)은 그런데 보편적 이미지-기표로서의 돌이 아니라 문화적 특수성, 장소성을 담지한 사물이다. “중국 쑤저우 부근의 태호에서 발견되는, 까무잡잡하고 구멍이 많은 복잡한 형태의 기석”인 괴석은 그 형태로 인해 정원의 장식으로,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대상으로 줄곧 인용되어 왔다.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618-907) 시기 시인 백거이(772-846)가 자신의 시 10여 편을 가장 으뜸 괴석인 태호석을 주제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태호석이 대표하는 괴석에 대한 중국 귀족과 문인-예술가들의 사랑, 예술의 대상으로서의 괴석의 가치는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나는 괴석을 곧장 팔루스적 남근에 대한 가부장제의 숭배와 연결하는 무지를 잠시 반복했는데, 괴석은 누가 보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전혀 다른 텍스트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구적인 남근석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사물, 물신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괴석은 너무나 모호한 대상이어서 어떤 하나의 기표로, 상징으로 진정되지 않는, 다의성의 출처, 말하자면 “구멍”(여성적 사물?) 같다.
참조한 논문에 등장하는 괴석을 칭송한 역사적 문헌은 모두 괴석 자체가 아닌 괴석이 일으키는 풍부한 환유적 이미지들, 다의성을 기록함으로써 괴석이 얼마나 상상력을 자극하는지를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다. 가령 남송의 범성대(范成大)란 문인의 글 일부를 인용해 본다. “파도의 물결에 깎여 구멍이 뚫리고 물이 잠겨 씻기에 매끄럽게 되고 혹은 촘촘하게 적시어져 옥처럼 되고 혹은 곧게 깎여 칼과 창처럼 되고 가지런히 곧은 것이 산봉우리 같고 벌려지기가 병풍 장자 같고 혹은 미끄러운 것이 기름진 듯 하고 혹은 검푸른 것이 옷칠한 듯 하고, 혹은 사람 같고 혹은 짐승 같고 혹은 새 같다. 고려의 사신에 의해 이곳에 처음 소개되고 조선에서 본격 유행하게 되는 괴석 문화는 참조한 논문에 의하면 특히 18세기에 정점에 달한 듯하다. 그리고 식민화와 근대화가 중첩된 이곳에서 창설된 근대 국가가 요청한 정체성, 특히 문화적 정체성을 위해 수묵화를 한국화의 기원 중 하나로 제정하는 과정에서 괴석도 탈역사적 도상으로 변모된다. 가장 평균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AI는 괴석 수묵화를 “산수-문인화에서 자연의 불변성과 장소, 선비 정신을 상징적으로 담아내는” 장르로, 괴석은 “군자의 덕목을 구현하는 상징”으로 정의하고 있다. 태호석의 “수척함, 뚫림, 투명함, 주름짐”을 중국 이론가로서 “중국 예술의 신비한 세계”와 (재)연결하려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문인화적 정신을 한국적 회화의 정체성과 절합하려는 이곳의 21세기 전후 남성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하는 괴석의 “발견”이 있었던 듯 하다.
작가는 동양화에서 출발한 젊은 여성 예술가라는 자신의 교차적 위치에서 이러한 물려받은 전통이자 동시대 남성 예술가들이 전유한 문화로서의 괴석을 “이성애와 결혼을 목적으로 소개받은 남성들에 대한 인상”을 반영하는 담지자로 재전유했다. 2014년의 <괴석 시리즈(Odd Stones series)>는 문화적-환경적 맥락을 뺀, 그러므로 고립된 괴석들을 그린 연작이다. 수묵화를 남성 문화로 재해석한 것이고, 괴석을 상징계적인 물신으로서의 남근의 이미지로 전치시킨 것이다. 그러나 차용-패로디란 형식이 내포하는 의도된 가벼움이나 희화화가 직접적으로 읽히지 않게끔 “신중하게” 자신의 무대를 설치함으로써, 작가는 동시대 예술 혹은 더 정확히는 개인의 자율성을 절대화하는 서구적 문화(의 관습)에 대한 동일시도 경계하려 한 듯하다. 여성적 이미지-도상을 통해 남성 문화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도모한 진영에 의탁하지 않은 채, 작가는 사적인 관계에서도 작동하는 가부장적 남성 문화를 관찰하고 해석하면서 수묵화 안에 어떤 젠더를, 어떤 차이를 각인하려고 했다. 젊은 여성 동양화 작가의 “괴석 시리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전수된 보편 문화에 젠더-차이를 표식하려는 페미니스트적 개입이 읽힌다. 작가의 현재의 작업에 비추어 2014년의 작업을 다시 읽으면, 비단 남성 문화에 대한 자의식적 비판뿐 아니라 고착화된/물화된 괴석 이미지를 불안정화하려는, 그럼으로써 괴석에 대한 자신의 미적 형상을 첨가하기 위해 우선 그것의 상투형과 대면하려는 전략도 읽힌다. 내게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2024년 작 <rolling air rocks>이다. “화선지에 먹”과 “천연 밀랍”을 첨가해서 벽에 서 있는 조각이 된 괴석 사물이다. 화선지에 작가의 시그니쳐 형상이라 할 수 있는 날카로운 선들을 붓으로 그리고, 커터칼을 사용해서 화선지에서 주로 “여백”이었던 부분을 잘라내어서, 화선지의 양적인/가시적인 이미지-형상과 바람이 통과하는 음적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입체-몸”으로 보이도록 제작한 후, 작가는 자신의 오브제에게 “구르고 있는 공기 바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역시 동명사적 사태를 환대하는 환경적인 조각을 만들었다. 명사로서의 본질-실체에 대한 동명사적 반격은 그러한 본질-실체에서 배제된 소수자들의 공통의 전략이기도 하다.
2025년 작가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중국의 괴석 문화를 주제로 한 논문 혹은 전시도록 「기의 핵심-지구의 뼈들(Kernel of Energy – Bones of Earth)」을 손에 넣게 된다. 거기서 괴석을 너무나 사랑했던 백거이의 시, 작가가 반응할 어떤 시적 형상을 담지한 괴석에 대한 묘사를 발견한다. 당시 괴석의 최고 감상가이자 거대한 괴석 정원을 갖고 있던 친구(Nui Sengru)의 시에 대한 화답으로, 백거이가 쓴 시에서 작가는 다음 부분에 매료당하고 이번 전시를 위해 번역하고 유리 위에 필사했다.
내부에서 솟아오른 곳에서는 조용한 속삭임이 들린다
바람의 자궁인가?
날카로운 칼날이 각진 가장자리에 보인다.
그 울림은 벽옥 종소리보다 더 또렷하다.
거대한 형체가 움직이는 듯하고
거대한 힘이 무너지기 직전인 듯하다.
숨겨진 유령들에게 반응하는 희귀한 형체들
억눌린 바람과 천둥과 어울리는 영혼
새벽 비에 젖은 윤기 나는 검은 색
고대 이끼가 점처럼 박힌 찬란한 무늬
새에게는 깃들 곳을 주지 않고
먼지에게는 쉴 곳을 주지 않는다.
이 시에서 백거이가 주목한/응시한 것은 괴석의 양적 형태가 아닌 구멍들, 구멍의 풍부한 이미지들이다. “바람의 자궁(woms of winds)”이란 문구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괴석의 음화, 부재, 어둠마저도 괴석으로 포용하는 관용, 환대를 함축한다. 백거이의 시는 괴석, 괴석 문화를 남성적 기표나 도상으로만 볼 수 없는 여지-잔여를 작가에게 선물했다. 백거이의 묘사는 근대를 거치며 남성적 기개나 군자의 정신으로 상징화된 괴석을 수정할 수 있는 좋은 단서, 근거이다.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문헌의 문장을 “흰 유리 가루 위에 칼로 흐릿하게 새기고 가마에 구워내는 식”으로 물질화하고 시각화했다. 중국인의 자랑인 백거이의 시, 여성적인 공간 혹은 응시를 반영한 부분을 인용하되 작은 가방에 넣어서 갖고 다녀도 될 만큼 작은 조각들로 만들어서 시가 적힌 종이를 대체한 철판 위에 올려놓았다. 중국의 괴석 문화를 주제로 한 미국의 전시에서 괴석은 “지구의 뼈”로 해석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개인전 제목을 “안개와 뼈”라고 선정함으로써 안개-바람-구름을 형태-핵심-가시성보다 우위에 두는, 심지어 자신의 위치에서라면 “뼈는 견고한 핵이 아니라 흩어지는 가루”라고 급진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므로 “안개와 바람과 구름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생성의 순간을 품은 밀도”라고, 이분법을 뒤집어서 중성적인 사이를 일으키는 해석을 내놓았다. 안개와 뼈는 사이(inbetween)에서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사태를 읽는 작가만의 방식을 통해 전치되고 중첩된다. “뼈를 그리듯 구름을 그리고 흩어지는 얼룩 같은 뼈를 오린다”는 작가의 문장은 화선지에 선들을 거칠게 그리고, 커터칼로 오리고, 벽에, 유리에, 스테인리스에 정확히 배접은 아닌, 그러므로 “일종의 배접”을 수행하는 작업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의 문장은 명시적으로 젠더 위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암시적으로 위계화된 관념들의 질서를 허물면서 젠더적 실천을 담지한다. 이러한 태도가 이 작가를 명백한(apparent) 페미니스트적 작가로 읽히지 않게 하는, 어떤 집단적 실천으로 묶을 수 없게 하는 독특한 차이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사이-틈이다.
지배 문화와 불화하는 개인 예술가의 위반적 실천으로 의미화된 서구적 예술과 달리 이곳에서 예술은 지배계급 남성들 혹은 지식인-문인들이 생산자이자 향유자인 독특한 맥락에서 만들어지면서 전승되었다. 수묵산수화를 남성들의 배제적 문화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방향이 있을 수 있고, 채색화-민화에 의탁하면서 여성적 이미지를 모색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서구적 예술의 타자로서 바깥으로부터 이식되어 내면화의 과정을 거쳐 정체성까지 확보한 아시아-동양 미술을 더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방향이 있을 수 있고... 작가는 전통으로 박제화된 수묵화를 물성이라는 전제-형식-조건만 뺀 나머지를 통해 탈-구축함으로써, 포스트-수묵화를 출현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수묵화는 아니지만 수묵화인 그림-제스처를 획득했다. 계속 산다는 것은 순응하면서 이탈하는 것이고 공모하면서 부정하는 것이고 강화하면서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또 시작하기-반복하기
작가는 수묵화의 형식으로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는 거친 붓질을 화선지에 올리고, 커터칼로 남길 부분과 제거할 부분을 정리하고, “일종의 배접”을 통해 유리판이나 스테인리스판 위에 부착한다. 우리는 “주변과 반응하고 회화의 경계선이 남지 않고 빛과 반응하는,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재료의 끝판왕”인 유리를 자신의 화선지-오브제-드로잉의 지지대-바탕으로 전유하는 작가의 작업, 즉 레진 처리된 강화 백유리 위에 “난도질”한 화선지를 붙여서 포스트-수묵화를 만들었던 작업 방식 다음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스테인리스 혹은 알루미늄 프레임에 부착된 화선지 드로잉을 보게 된다. 화선지의 투과성은 유리의 투과성과 인접했고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유리보다 더 흐릿한 반영성을 장착한 대량산업 제품인 그런 프레임들이다. 작가는 이번 자신의 화선지-콜라주의 바탕으로 선택된 스테인리스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유리처럼 투명하지도, 거울처럼 상을 고정적으로 반사하지도, 벽처럼 닫혀있지도 않다. 특정한 이미지를 확정하지 않는, 익명의, 중간적 상태를 보여준다. 그런 감각적 안정, 편안함. 담(淡)먹, 중간톤의 회색, 비결정성, 생동감과 존재감이 있는 물질이다.” 더 정확하고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 영향력을 갖는 우리의 상황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러한 재료의 선택은 더 흐릿하고 모호한 방향으로 가겠다는 “결기”로 읽히기도 한다. 더 포용적이고 더 유연한, 그러므로 덜 주목을 받는 물질-미디움에 대한 작가의 주목은 나타남보다 사라짐을 주체적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소수자적 스탠스의 예시로도 분석된다.
2023의 대형 설치작 <원-피스, 520cmx380cm>는 붓으로 그리고 칼로 오리고 막대기에 걸어 놓은 “키네틱 조각”이자, 포스트-수묵화이자, 괴석의 물질적 차용인 채로 전시장에 놓여 있었다. 백거이의 시에 표식된 “음(negative)”-여성적 공간을 경유해서 다시 괴석의 형상을 되찾은 작가는 “구멍과 순환에 대해서는 이미 백거이 이전에도 깨닫고 있었고 형상이 아닌 듯한 결과물이 마음에 남아서 백거이의 시를 읽었을 때 강하게 와닿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개인전에서 고전적인 의미에서 회화를 거는 벽면에는 스테인리스 프레임에 배접된 그리고-오린 화선지 작업들이 걸렸고, 전시장 한 가운데서는 스틸 봉에 걸린 대형 화선지 작업이 바람-빛과 조응하며 흔들리고 숨을 쉬었다. 바닥에 슬쩍 뿌려진 유리 조각들이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며 여분의 타자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흰 응결>, 접히고 펼칠 수 있고, 늘어지고 걸쳐있고, “난도질”의 쾌락을 통해 면적만큼 구멍도 공동-존재하는, 이 독특하게 동양적인, 즉 관념으로서의 동양화를 실재로서의 동양화로 번역하고 대체한 사물을 나는 작가의 조각이라는 분류에 여성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여 여성적 조각이라고 부르고 싶다.
서구적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스트적 개입이 불필요해 보일 만큼 동양 사상에서는 음-양의 조화에 대한 오랜 수행과 실천이 있었고(물론 이것이 주로 남성 지식인들의 수행-실천 속에서 전승되었다는 것도 동시에 지적하자), 명시적으로 페미니스트적인 위치를 드러내지 않는 기민정 작가의 지난 10여 년간의 부단한 동양적인 것 안에서의 실험과 확장이 비서구적 예술의 자기-쇄신의 일환으로 갖는 의의를 동시에 여성적 물질, 여성적 작업에 대한 고집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바깥으로서의 서구와의 차이를 통해 정체성을 확보한 동양화의 비본질적인 혹은 역사적인 자기-쇄신의 맥락에서 이 작가의 페미니스트적인 방법론과 절합된 예술적 수행의 다음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2023

